Winter



11.
백기가 임무 중 사소하게 다치면 항상 캐릭터 반창고를 붙여주는 청아. 이건 청아가 다쳐온 그에게 내리는 자그마한 벌과도 같을 거야. 어쩔 수 없네요···. 집에 남은 밴드가 이거밖에 없어서. 청아는 당황해하는 백기를 보며 웃음을 눌러 참았어. 그러곤 정작 자신이 다쳤을 때에는 평범한 반창고를 붙이고 다녔지. 그 모습을 모를 리 없는 백기는 청아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녀가 내리는 벌을 달게 받기로 해. 백기의 손등에 붙여진 캐릭터 반창고를 본 고진과 다른 특파대원들은 기겁했지만···. 백기는 그 반창고를 볼 때마다 머릿속이 온통 청아로 가득 차는 느낌이 나쁘지만은 않아서 굳이 떼내려 하지 않을 거 같지.

12.
백기는 경찰학교 생활을 하며 주변에 항상 남자들만 가득했기 때문에, 청아와의 첫 연애가 어렵게 느껴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어. 무심코 일으킨 백기의 바람에 단정했던 청아의 앞머리가 날아가버린다거나, 할 때면 눈썹을 올린 채 화난 표정으로 백기를 바라보는 청아. 아침마다 앞머리를 세팅해야 하는 수고스러움을 몰랐던 백기는 어리둥절한 채로 급히 청아의 앞머리를 정리해 줘. 괜스레 억울해지는 때도 있을 거야. 스킨케어 이후 30분 간은 뽀뽀를 금지당한다던가. 아, 지금은 안 돼요. 단호하게 자신을 밀어내는 청아에 축 처진 채 슬픈 눈빛을 보내보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 청아가 생리통으로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관련 지식이 많지 않은 백기는 약국과 편의점을 털어 생리통에 좋다는 것들을 잔뜩 사 오고. 가끔 청아의 생각이 났다며 사 오는 화장품들도 그녀가 원래 쓰던 것들과는 톤이 맞지 않아 곤란해지는 경우도 있었어. 그럴 때마다 청아는 항상 여유로워 보이는 선배도 연애는 처음이 맞구나··· 하고 새삼스레 깨달아. 흔히 볼 수 없는 그의 미숙한 모습. 서툴지만 언제나 최선을 다해 자신을 생각해주는 백기에 감동받겠지.

13.
시험기간이 되면 밤을 새우는 날이 잦아져 항상 커피를 옆에 두고 마시는 청아. 백기는 그런 청아가 내심 걱정될 거야. 커피는 몸에 좋지 않을 텐데···. 결국 큰 맘을 먹고 매점에서 차 종류의 음료를 구매해 간단한 쪽지를 남기기로 했지. [커피는 건강에 좋지 않으니 다른 음료를 마셔. 이 차가 피로 해소에 도움이 된대.] 하얀 쪽지 위 구불구불 알아보기 힘들게 쓰인 백기의 문장들. 책상 위에 놓인 쪽지를 발견한 청아는 그 내용을 제대로 알아볼 순 없었지만, 쪽지의 발신인은 정확히 알 수 있었지. 그 선배 되게 악필이구나. 어쩌다 보니 자신의 곁을 맴도는 백기에 대해 하나 알게 된 청아. 오늘은 커피를 참아볼까···. 제 손에 들려있던 커피를 내려놓고 차를 한 모금 마셨어. 조금은 시큼한 맛. 청아의 취향은 아니었는지 순간 얼굴이 찌푸려졌지만 그 끝은 어쩐지 달콤해 결국 미소 짓게 될 거야.

14.
연모시의 어느 겨울밤, 백기와 눈길을 걷던 도중 청아는 강아지 모양의 눈 모형을 발견해. 아침에 아이들이 노는 소리가 들리던 게 눈강아지를 만들던 거였나···. 아직은 서투른 어린아이의 솜씨가 보여 더 귀여웠을 거야. 청아는 내친김에 그 옆에 자리를 잡고 눈을 굴리기 시작했어. 목표는 백기를 닮은 눈 늑대 만들기! 갑자기 앉아 쪼물쪼물 눈을 만지고 있는 청아를 본 백기는 눈밭을 뒹구는 북극여우가 생각나 그녀 몰래 미소 지었지. 추위도 많이 타면서···. 청아가 열심히 눈사람에 늑대귀를 붙이는 와중에도, 백기는 빨갛게 물든 청아의 볼이 신경 쓰였어. 청아야, 너 볼이 빨개졌는데... 많이 추워? 백기는 걱정되는 마음에 장갑을 벗고 핫팩으로 따뜻하게 만든 제 손을 청아의 얼굴에 가져다 댈 거야. 정작 자신의 볼도 빨개진 걸 모르고. 그 모습을 본 청아는 백기의 커다란 손에 얼굴이 붙잡힌 채 살풋 웃었어. 풉, 선배도 볼도 엄청 빨개요. 백기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청아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더니 볼에 살짝 입 맞추어주었지. 어때요, 따뜻하죠? 백기는 제 얼굴에 내려앉은 부드러운 촉감에 잠시 말을 잃더니 이내 청아의 허리를 끌어당겨. 응, 반대쪽도 해주면 더 따뜻해질 거 같은데. 당당하게 얼굴을 내미는 백기에 청아는 저항 없이 웃음을 터트렸지. 그렇게 반대쪽도 똑같이 입 맞춰주자 백기의 몸이 청아에게 더 가까이 맞붙으려 움직였어. 어쩐지 달라지는 분위기···. 그 낌새를 눈치챈 청아가 빠르게 백기의 팔을 저지하고 그의 품에서 빠져나갔지. 이제 끝! 이 늑대 친구를 멋지게 완성시키기 전까지는 안 돼요. 눈늑대를 애지중지하며 열심히 만드는 청아를 보고 있자니 괜히 질투가 나는 백기. 집에 들어간 이후엔 추위를 핑계로 잘 때까지 청아를 끌어안고 있어야겠다고 다짐할 거야.

15.
메인스토리 1부 초, 청아는 백기가 고등학생 시절 자신을 버렸다고 오해하고 있었어. 때문에 고등학교 때처럼 여전히 애틋한 분위기로 다가오는 백기를 이해할 수 없었지. 그날은 백기가 청아의 유독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든 날이었을 거야. 특파팀 대원들 앞에서 어릴 적의 일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가 하면, 미궁에 빠진 청아의 담당 사건을 대신 도맡아 해결해주기도 했지. 도대체 왜···. 아직도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구는 백기의 행동이 도통 이해되지 않아. 복잡해진 마음을 달래주는 건 퇴근 후 동료들과 술자리였어. 평소에 특파팀의 회식을 자주 참석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백기가 연모시로 전근 온 이후 부쩍 그 빈도가 늘었어. 청아는 이 날도 어김없이 회식에 참여하겠다 선포하고 일을 마무리 지었지.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백기는 본인도 업무를 빨리 마무리 짓고 회식에 합류해야겠다, 생각했지만 긴급 임무가 떨어져 그를 필요로 하는 어딘가로 출동할 수밖에 없었어. 다행히 장기 임무는 아니라 서둘러 일을 마무리 짓고 술자리로 가보았지만, 청아는 이미 취할 대로 취해 엎어진 상태였지. 자고 있는 듯한 그녀에게 조심스레 다가가자, 청아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백기의 멱살을 붙잡아. 야 이 나쁜 놈아! 너는 사랑이 쉬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의 얼굴로 백기의 셔츠를 부여잡고 흔들어대기 시작했어. 백기는 숨을 크게 들이켜곤 겨우 입을 열었지. 청아야, 잠시만 이거 놓고··· // 말 끊지 마!! 정작 백기의 뒷말을 막은 건 청아 본인이었으나 만취 상태의 그녀에게 말이 통할 리가. 나쁜 놈... 평생 혼자 살아. 그 뒤로도 계속 백기에게 온갖 악담을 퍼붓다 결국 그대로 쓰러져 잠들어 버리는 청아. 백기는 잠든 청아를 바라보다 그녀를 가뿐히 안아 들고는 가게 밖을 벗어나 날아올랐어. 청아의 집은··· 분명 여기였지. 지난날, 자신이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하자 뚱한 표정을 지으며 다른 주소를 부르던 청아의 모습을 떠올려. 거짓말, 내가 너희 집을 모를 리 없잖아. 턱 끝까지 올라오는 말을 애써 참으며 백기는 청아가 부른 다른 주소로 데려다줬었지. 그렇지만 청아가 곤히 잠들어버린 지금만큼은 진짜 그녀의 집으로 향해. 다음 날 아침, 청아는 익숙한 천장을 보며 눈을 떴어. 어··· 나는 분명 도유와 백 팀장님 욕을 하다가···. 흐릿해진 기억 속, 함께 그를 욕해주던 도유의 얼굴 사이 갑자기 험담의 당사자인 백기가 등장해. 왜, 왜 선배가 회식에...! 일순간 자신이 백기의 멱살을 잡으며 부렸던 행패가 모두 떠올랐지. 소란의 중심이었던 백기와 청아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동료들과 부하들의 시선까지도. 아아··· 나는 옛 일을 들추며 직장 동료를 몰아가는 사람이 되어있겠구나. 백기에게 추태를 보인 것만으로도 창피한데 그와의 악연을 직장 사람들에게 알린 꼴이 되었다니, 청아의 심정은 암담하기 그지없었어. 절망감을 뒤로한 채 휴대폰을 켜보니 백기의 문자가 와 있었지. [내가 특파팀에는 잘 말해놨으니, 오늘은 좀 늦게 출근해도 괜찮아.] 청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문자를 읽고, 읽고 또 읽었어. 그렇지만 아무리 문자를 다시 보아도 남자의 속마음이 뭔 지는 알 수 없었지. 5년 전 나를 버리고 떠난 그가 맞는가. 이제 와서 다시 잘해주는 건, 나를 또 가지고 놀려고···! 백기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청아에겐 그의 배려있는 행동이 이렇게 해석될 뿐이었어. 그치만 그 다정한 모습이 고등학생 때와 닮아 보여 여전히 그에게 설렌다는 걸 부정할 수도 없었지. 하... 나는 뻔히 다 보이는 카사노바에게 두근거리는 거야? 백기의 행동도, 자신의 마음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아침. 그가 연모시로 온 뒤로 평화롭던 제 일상이 완전히 박살 난 기분이었어. 경찰학교에서도 끊임없이 따라다니던 백기와의 추억들을, 특파팀에 온 이후 일이 바빠져 겨우 잊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뭘까. 어렸던 열일곱 나의 마음을 전부 빼앗아가시고, 바람처럼 홀연히 사라진 당신. 다시 나타나 당신을 잃은 동안 제법 단단해진 나의 마음을 흔드시네요. 이번에도 여름날의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실 건가요?

16.
연애 초반의 백기는 생각보다 청아의 외관 변화에 둔할 거 같아. 화장 전후의 차이도 잘 모르겠다고 하고···. 청아의 머리가 가슴 밑까지 길어져서 헤어샵을 다녀온 날, 백기에게 은근슬쩍 질문했을 거야. 선배, 저 오늘 뭐 달라진 거 없어요? 그래도 그가 조금은 발전하지 않았을까 싶어 기대하는 눈빛으로 백기를 바라보는 청아. 백기는 꽤나 오랫동안 침묵하며 청아의 이곳저곳을 살피는가 싶더니 천천히 입을 열였지. ···굳이 달라진 점을 찾자면, 오늘따라 더 예뻐. 자칫 입에 발린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청아는 그의 진심을 알기에 그저 피식 웃을 뿐이야. 바보···. 머리 잘랐거든요? 조그마한 변화는 알아차리지 못해도 언제나 진지한 표정으로 예쁘다 말해주는 그를 어떻게 미워할 수가 있겠어. 그제야 청아의 머리끝을 매만지며 탄식을 내뱉는 백기. 아···. 큼, 다음부턴 꼭 알아볼게.

17.
손에는 따뜻한 코코아, 테이블에는 백기가 한참을 신중하게 깎던 사과들. 청아는 제 집을 둘러보다 크리스마스 트리에 시선을 돌렸어. 산타가 정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백기는 청아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멈추더니 이윽고 입을 열어. 난 산타는 믿지 않아도 널 믿으니까. 네가 내 산타야. 백기의 뜬금없는 말에 청아는 먹던 코코아도 내려놓고 크게 웃었지. 앞으로 크리스마스마다 선배 앞에 흰 수염 달고 나타날까 봐요. 손으로 수염을 매만지는 척하는 청아를 보며 백기도 함께 웃음을 터트렸어. 아주 귀엽겠는걸. 그러곤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말을 천천히 내뱉는 백기. 너와 함께 있으면 내 모든 소원이 이루어져. 너만이, 내 소원을 이루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야. 청아는 제게 내려앉은 따스한 눈빛을 응시하며 장난스레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지. 그럼 백기 어린이, 올해는 어떻게 지냈나요? 솔직하게 대답해 주세요. 소원을 들어줄지 결정해야 하거든요. 백기는 산타인 척 근엄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청아가 사랑스러워 환한 미소를 띠고 대답했어. 음... 올해 봄에는 그녀와 소풍을 갔어요. 그녀보다 빨리 일어나 도시락을 준비하려고 했는데, 빵을 태우는 바람에··· 그녀에게 들키고 말았지만요. 백기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청아는 그가 식빵을 태우고 안절부절못하던 모습을 떠올리곤 피식 웃음을 흘렸지. 백기가 케찹으로 청아의 모습을 그리다가 망쳐 좌절하는 영상도 그녀의 휴대폰 속에 남아있었을 거야. 청아는 역시나 바보 같은 케찹 그림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먹기가 아깝다고 느꼈겠지. 여름에는 그녀와 수상 스포츠를 즐겼어요. 수상 스포츠 난이도가 꽤 높아서, 그녀의 눈에 눈물이 딱 한 방울 났다는 건 우리의 비밀로 해둘까요. 청아는 눈물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흠칫 놀라더니 백기의 가슴을 아프지 않게 때렸어.
그거 바람이 정면으로 불어서 그랬다니까요?! 백기는 파도가 칠 때마다 입술을 깨물며 긴장된 표정을 짓던 청아를 떠올리며 웃었지. 바람도 세고, 물결도 거센 날이었지만 용감하게 서핑보드에 올라탄 그녀가 대견하기도 했어. 응, 맞아. 다음부턴 바람한테 살살 불어달라고 해볼게. 백기는 청아의 코를 톡 건드리곤 바람을 일으켜 그녀의 곁을 감쌌지. 어쩐지 따뜻하게 느껴지는 바람에 청아는 짐짓 화난 체하던 표정을 풀어. 큼... 그래서 가을은요? 이제는 은근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백기를 바라보는 청아. 가을에는 그녀와 함께 다니던 고등학교에 갔어요. 바뀐 것 하나 없이 그대로라서 정말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었죠. 그녀도 옛 추억 속의 모습 그대로, 정말 아름다웠어요. 백기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열일곱의 청아를 떠올려. 조그마한 손으로 펜을 쥐고 열심히 써 내려가던 글자들.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빤히 바라보고 있으면 청아는 백기에게 작은 쪽지를 넘겨줄 거야. [그만 쳐다보고 공부해요. 닳아야 하는 건 제가 아니라 책이라고요!] 그리고 같은 도서관에서 스물셋의 청아가 속삭였던 말도 그의 머릿속에 맴돌았지. 저 말고 책에 집중해요···. 공 선생님 표정이 심상치 않으세요. 청아는 공 선생님의 은근한 눈빛을 신경 쓰는 듯 백기의 다리를 살짝 꼬집었어. 오히려 그녀의 그런 모습이 백기의 시선을 더욱 이끌리게 만들었지만. 6년을 지나도 여전한 그녀의 행동을 떠올리며 또 한 번 사랑을 깨달은 순간이었지. 겨울에는 그녀와 군고구마를 먹었어요. 사실 한동안 길을 걸을 때 그녀의 시선이 온통 군고구마에 집중되어 있었거든요.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서 잔뜩 사준 기억이 있네요. 청아는 아직도 한가득 남은 고구마 박스를 바라보며 쿡쿡 웃더니 이내 엄숙한 말투로 물었어. 백기 어린이 멋진 한 해를 보냈네요! 그녀도 분명 좋아했을 거예요. 그럼 소원이 뭔지 들어볼까요? 백기만의 산타클로스는 무엇이든 말해보라는 듯 그를 재촉했지. 내 소원은··· 몇 십 년이 지나든 우리의 이런 소중한 추억들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거야. 만약 우리의 마음이 멀리 떨어질 일이 생긴 대도, 네가 행복했던 기억들을 남겨둔다면 내가 다시 너에게 갈게. 늘 마음에 담아뒀던 말인 것처럼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는 백기에 청아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어.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 소원이네요, 약속할게요. 그때는 선배가 저의 산타클로스가 되어주세요. 예상치 못한 선물처럼, 꼭 나타나주셔야 해요. 청아는 백기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그의 허리를 감싼 손에 더욱 힘을 주었지. 백기는 그에 응답하듯 청아의 귓가에 살짝 입을 맞춰주었어. 물론이지. 네가 어디에 있든 나는 언제나 너에게로 향할 테니까.

18.
청아는 그녀의 이모가 이볼버에 의해 사망했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 경찰이 될 마음이 없었어. 열아홉의 청아가 사건의 진상을 전부 알게 된 이후,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살려 특수경찰이 되리라 마음먹었지. 그렇지만 그녀는 고등학생 시절 늘 앉아서 공부만 해오던 터라 몸을 쓰는 법은 아예 알지 못했어. 운동을 꾸준히 해오던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누군가와 몸싸움을 해본 것도 아니었지. 그녀가 가진 것은 오로지 순수한 열정뿐. 청아는 그 열정을 무기로 경찰학교의 입학시험에 응했어. 경찰학교의 입학시험은 다른 일반학교들과는 달리, 매우 비윤리적이고 잔인했지. 그 속에서 청아는 다른 이가 휘두르는 주먹을 맞고 있기만 했어. 더 이상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어려울 만큼 온몸에 힘이 풀리고, 피범벅이 되더라도. 죽기 직전의 고통이 그녀를 감싸도 청아는 절대 포기를 외치지 않았지. 목표를 확고히 정한 이상, 그녀에게 남은 길은 이거 하나뿐이었으니까. 입학시험을 심사하던 이들의 표정도 하나둘씩 변해갔을 거야. 몸을 제대로 쓸 줄도 모르는 애가, 저 정도의 끈기로 고통을 참아내다니. 결국 그들은 청아의 입학을 허가할 수밖에 없었어. 청아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경찰학교를 향해 천천히 한 걸음씩 나아갔지. 그녀가 훈련장에 들어서자 주변의 학생들은 모두 경악했어. 아무리 입학시험이 잔인하다고 소문났다지만,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다쳐온 사람은 그들도 처음이었거든. 쟤는 훈련장이 아니라 빨리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하나둘씩 들려오는 자신을 향한 소음에 청아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지. 아··· 내가 정말 합격했구나. 피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에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미소가 짧게 스쳐 지나갔어.

19.
메인스토리 1부 백기와 청아가 서로의 마음을 고백한 다음 날···. 백기는 여전히 밤늦도록 야근 중이었어. 옆엔 그의 오랜 동료인 고진과 함께. 사무실 안에는 각자 조용히 서류를 넘기는 소리만 들렸지. 그러던 중, 서류를 열심히 읽고 있던 고진에게 백기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 순간 고진은 이 방 안에 자신과 백기 말고 다른 사람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되었어. 그도 그럴 것이 백기의 웃음소리는··· 꽤 흔치 않은 것이었거든. 고진은 자그마한 의문을 품은 채 다시 사건 파일에 집중했지. 그러나 그가 서류의 뒷장을 넘기기도 전에 다시 들려오는 웃음소리. 평소 무표정으로 일하던 백기는 어디로 갔는지, 계속 미소를 띤 채 이따금 피식거릴 거야. 너 과로하더니 드디어 미쳤냐? 고진은 제 친구의 안위를 위해 지금 당장 그를 병원에 데려가야 할지 짧게 고민했지. 백기는 고진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 듯 가볍게 무시하며 청아에게 온 연락을 확인해. 나 먼저 퇴근한다. 산더미 같던 일거리를 어느새에 다 끝낸 건지 고진만을 덩그러니 남겨두고 방을 나가는 백기. 그건 아마 고진은 몰랐던 사랑의 힘··· 이었겠지. 자그마치 7년을 거쳐 돌아온 사랑을, 그 무엇이 이길 수 있겠어.

20.
청아가 백기에게 스며들어 그를 사랑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백기의 다정함 아니었을까. 모두가 그를 문제아 취급했던 고등학생 시절, 유일하게 백기의 다정을 알아챈 것도 청아였으니까. 바람이 불어 어지럽혀진 머리카락을 꼼꼼히 정리해 준다던가, 청아의 이야기라면 전부 기억해두고 하나하나 챙겨주는 것들. 청아는 사랑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그의 다정함을 좋아할 거야. 가끔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챙겨주는 백기에 당황도 하겠지만. 선배, 이거 제가 할 수 있는데···. 청아의 손사래에도 아무렇지 않게 제 할 일을 이어나가는 백기. 응, 나도 할 수 있어. 오히려 태연한 동문서답으로 청아를 황당하게 만들겠지. 챙김 받는 것에 익숙해져 나중엔 선배한테 응석이라도 부리면 어쩌지··· 짧게 고민해보는 청아야.

DALB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