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nter



21.
평소 수면 환경에 예민해 쉽게 잠들지 못하는 편인 청아. 그렇지만 백기는 이 사실을 오랫동안 알지 못했을 거야. 그도 그럴 것이 청아가 백기의 품에만 안기면 유독 빨리 잠들어버렸거든. 가끔 다른 곳에서 잠든 청아를 침대로 옮길 때 미동도 않는 그녀를 보고 백기는 내심 걱정스러웠지. 잘 때 누가 들고 도망가도 모르겠어···. 익숙한 향과 온기가 느껴지는 백기의 품이라 깨지 않는다는 걸 모르고. 다른 누군가가 안아 들었다면 아무리 깊은 잠에 들었어도 깨어났을 청아가, 그 한 사람의 품에선 더욱 편안해질 거야.

22.
늦은 저녁, 백기와 청아가 술잔을 기울이며 나누는 대화들. 얼마 전 청아가 다녀온 연모고등학교 동창회가 주된 이야깃거리였지. 다들 많이 변했더라고요. 몰라볼 뻔했어요. 청아는 고등학교 때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의 친구들을 하나둘씩 떠올려보았어. 우리가 만난 지도 7년이나 흘렀다니···. 너는 별로 안 변했어. 백기는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빠진 청아를 흘깃 보곤 짧게 대답했지. 그 말에 청아는 한 번 웃더니 백기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여. 정말요? 선배는 조금 달라진 거 같은데. 얼굴에 웃음기를 띠고 아무렇지 않게 그가 서운해할 말을 내뱉는 청아. ...그래? 술에 취한 건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의 그녀에 백기는 잠시 멈칫할 거야. 고등학생 때 선배는··· 내가 이렇게, 바라보면 바로 시선을 피했거든요. 청아는 백기가 마시려던 술을 낚아채고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어.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서로만을 담은 호박색과 우주색의 눈동자. 그 누구도 먼저 눈을 떼려 하지 않았지. 그렇게 한참을 서로의 시선에 빠져 녹아들 때쯤, 정적을 깬 건 청아의 웃음소리였어. 풉, 이제는 이렇게 계속 오랫동안 바라볼 수 있어요. 좋은 변화랄까···. 느릿느릿 한 어절씩 발음하는 청아의 입술을 빤히 바라보던 백기는 그만의 달콤함을 찾아 삼킬 거야.

23.
긴급 임무: 《백 지휘관님의 분노를 누그러뜨려라!》
임무 중 큰 실수를 한 신입대원들 때문에 크게 화가 난 백기. 안전이 제일 중요하다고 여러번 강조했지만 명령도 따르지 않고 먼저 뛰어들어간 그들을 단단히 혼내는 중이었을 거야. 덕분에 특파팀은 엄숙해진 분위기 속 단체로 비상이 걸렸지만. 피의자 관련 조사를 하다 외부에서 돌아온 청아가 마주하게 된 것은 딱딱히 굳은 다른 대원들과 잔뜩 화가 난 백기의 얼굴이었어. 풉···. 제 앞에서 좀처럼 화내는 모습을 보이지 않다보니 청아에겐 꽤 흥미로운 광경이었을 거야. 청 팀장이 좀 말려봐. 청아의 옆에 서서 그녀를 쿡쿡 찔러대는 고진. 임무에서 돌아온 후 쉬지도 못하고 있는 백기가 내심 걱정되던 고진은 청아가 빨리 조사를 끝내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중이었겠지. 그도 청아 앞에서 이상하리만큼 녹아내리던 백기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더 구경하고 싶었는데··· 알겠어요. 백기의 사나워진 눈매를 유심히 관찰하며 웃던 청아는 아쉬운 마음을 접어두고 이미 열려있는 문에 노크해. 여기 계셨네요, 선배. 특파팀에 있을 때엔 철저히 백기를 ‘지휘관님’이라고 부르던 청아가, 이번만큼은 평소보다 들뜬 목소리로 그를 선배라고 부를 거야. 백기의 화를 풀어주기 위한 그녀 나름의 노림수였겠지. 그리고 백기는 그 노림수에 보답하듯 청아를 보자마자 찡그렸던 표정을 풀어. ···응, 너는 잘 다녀왔어? 청아가 다가오자 자연스레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는 백기. 평소 같았으면 그의 손등을 툭툭치곤 한 번 흘겨봤겠지만 오늘만큼은 그가 원하는 대로 놔두기로 해. 물론이죠. 그런데 저 지금 선배랑 같이 점심 먹고 싶은데, 안 돼요? 부러 눈을 크게 뜨고 백기를 올려다보며 하는 말. 백기는 청아가 자신의 화를 풀고 상황을 마무리 지으려 일부러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알았지만··· 어쩌겠어. 이미 그의 입꼬리는 잔뜩 올라가 있는걸. 그럴 리가, 같이 가자. 신입 대원들을 덜덜 떨게 만들었던 특파의 백 지휘관은, 어느새 제 연인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청아만의 선배가 되었을 거야. 이번에도 백기의 화를 푸는 임무에 성공한 청아는 뿌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시선을 돌려 신입 대원들을 불러. 너희도 가서 밥 먹고, 경위서 작성해서 내 책상에 올려놔. 이후에는 나랑 실전 훈련한다. 임무에서 막 돌아온 백기가 푹 쉬었으면 하는 마음에 청아는 자신이 대신 사건을 마무리하려 하겠지. 그렇게 둘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밥을 먹으러 특파서를 나가던 중··· 청아는 아까부터 계속 제 허리에 따라붙는 백기의 손이 신경 쓰였어. 그 손은 둘만 남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청아를 끌어당기며 더욱 달라붙으려 했지. 평소였으면 절대 이렇게 두지 않는 건데···. 백기의 화를 풀어주느라 청아가 그에게 약해진 것을 알고 그 틈을 파고드려 하는 백기가 원망스러워져. 선배 곧 1층인데...! 청아는 항상 붐비던 점심시간의 1층 로비를 떠올리곤 백기를 떼어내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지. 결국 동료와 부하들에게 민망한 모습을 들키고만 청아는 그의 팔뚝을 아프게 꼬집을 거야. 저리 가요. 방금까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청아가 입술을 잔뜩 내민 뾰로통한 표정으로 바뀌자 백기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어. 이건 아까 일부러 나를 유혹한 벌이야. 청아의 볼을 톡톡 두드리며 여유롭게 답하는 백기에 그녀는 그저 한숨만 내쉬었지. 항상 청아가 원하는 대로 쉽게 이끌려주는 듯한 백기였지만, 실상은 모두 그의 손 안에서 놀아나는 느낌···. 임무 결과:《완벽한 성공 !》그러나 어째 더 잃은 게 많은 거 같다···

24.
선배 입술 되게 거친 거 알아요? 오늘 오전, 앞머리를 롤로 돌돌 말고 있던 청아가 귀여워 이마에 입 맞추다 백기가 들은 말. 큼, 난 그런 건 잘 신경 안 써서. 혹시 아팠어? 머쓱한 듯 뒷목을 매만지는 모습에 청아는 픽 웃으며 대답해. 아뇨, 그래도 겨울철에는 립밤을 바르는 게 좋죠. 청아의 그 말 이후 백기는 립밤을 가지고 다니며 나름 열심히 바를 거야. 특파팀 대원들은 또 백 팀장님이 달라지신 거 같다며 수군댈 테고. 일주일 후··· 바쁜 임무를 끝내고 오로지 둘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을 때, 백기는 청아에게 이렇게 물어. 네가 말한 대로 꾸준히 립밤을 발랐는데, 이번엔 입술이 거칠지 않은지 확인해 볼래?

25.
연모고 재학 시절··· 청아는 날마다 새로운 상처를 달고 오는 백기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제가 싸우지 말랬죠, 선배. 반쯤 써가는 연고를 백기의 입술에 톡톡 발라주며 하는 말. 백기는 가까이 다가온 청아의 얼굴에 어떠한 변명도 내놓지 못 한 채 주먹만 꽉 쥐고 있었을 거야. 오늘 그와 다퉜던 무리는 몰래 청아에 대해 나쁜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던 아이들이었는데도. 네가 그런 말 듣는 게 싫어서 그랬다고, 솔직하게 말하기에는 아직 이른 열여덟. 입술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손의 촉감에 긴장되어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켜. 아, 움직이면 안 돼요! 백기의 목울대가 울렁거리며 입술도 크게 떨렸는지 놀란 청아가 그의 눈을 보며 다급히 외쳤어. 그 바람에 청아도 백기의 숨소리가 들릴만큼 가까워진 거리를 깨닫게 되고. 아···. 옆 교실의 학생들이 떠드는 소음은 어느새 조용해진 건지, 귓속에 울리는 소리는 오로지 서로의 호흡뿐. 그 순간의 3초는, 그들의 짧은 인생 속에서 어쩌면 가장 길게 느껴졌을 시간이었지. 백기는 청아의 떨리는 속눈썹을 바라보다 부끄러운 듯 먼저 고개를 돌렸어. 눈에 띄게 붉어진 백기의 귓가. 청아는 자신의 귀도 붉어진 건 아닐까 괜히 제 귀를 만지작거리며 연고를 정리해.

26.
내 어릴 적 꿈은 우주 비행사였어. 늘 멀리서 동경하던 우주를 직접 보고, 또 느끼고 싶었지. 저 별 보여? 저기 빛나고 있는 큰 별이 바로 목성이야. 목성은 중력이 강해서 지구에게 날아올 혜성과 소행성을 대신 가져간대. 청아야, 널 만난 이후로 내 꿈은 목성이야. 지구를 지키는 목성처럼, 내가 너의 모든 어둠을 막아줄게. 언제나 너를 수호하는 지구만의 목성이 될게.

27.
노란 은행잎이 휘날리는 가을, 열일곱 소년은 사랑에 빠졌어. 사랑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붙여도 되는 건가 싶을 만큼 조심스레 행동했지만. 매일 방과후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청아를 훔쳐보는 백기. 저 작은 머리에 다 들어가나··· 책상 위 높게 쌓아 올린 책들을 보며 괜한 걱정을 해보기도 해. 가끔 청아와 눈이라도 마주치는 날은, 밤새도록 그녀의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겠지. 청아도 당연히 그런 백기를 알고 있을 거야. 비 오는 날 우산이 없어서 곤란하던 찰나, 갑자기 책상 위에 생겨난 우산. 그리고 다음날 유난히 기침을 자주 하던 백기. 잠든 청아 위에 덮여 있던 담요와 그 옆자리에 남아있던 온기까지. 청아는 어느새 제 일상 속에 스며든 백기의 흔적들을 느낄 수 있었지.

28.
백기와 청아의 상징색은 각각 파란색과 흰색이에요. 여름에 태어나 바람을 닮은 백기, 겨울에 태어나 눈을 닮은 청아에게 딱 어울리는 색상이라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서로의 이름 속 색을 대표하고 있다는 점을 가장 좋아한답니다. 흰 백(白), 푸를 청(靑). 백기는 청아의 푸른색으로, 청아는 백기의 흰색으로··· 서로에게 물들어버린 두 사람이에요.

29.
백기는 텍스트가 꽤 건조한 편이라, 귀여운 이모티콘을 쓰는 일은 거의 없었어. 그런데 하루는 청아가 그에게 이모티콘을 선물해줘. [선배, 이 강아지 이모티콘 바람이랑 똑닮지 않았어요? 선물이에요!] 갈색 무늬의 흰 강아지가 특파팀의 대표 경찰견 바람이와 정말 닮아있었지. 청아는 반가운 마음에 백기에게 이모티콘을 사주었을 거야. 사실 청아도 백기가 이모티콘을 거의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실제로 사용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고. 다음날, 특파팀 단톡방에 올라온 귀여운 강아지 이모티콘 하나. 특파 대원들은 백기가 올린 난데없는 귀여운 이모티콘이 무척이나 당황스럽겠지. 급기야 해킹이나 휴대폰 도난을 의심하기도 할 거야. 지휘관님이 이런 걸 쓰실 분이 아닌데···. 대원들의 혼잣말을 듣고 있던 청아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고. 그 후, 백기에게 어쩌다 이모티콘을 쓰게 된 거냐고 물으면··· 네가 선물해준 거잖아, 하는 짧지만 진심이 담긴 대답이 나오겠지.

30.
백기에게 사건 파일을 전달하기 위해 지휘관이 사용하는 사무실에 온 청아. 늦은 오후, 조용한 사무실에는 백기와 청아 둘 밖에 없었지. 청아가 서류를 건네려 하자 백기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어. 잠깐 귀 좀 대볼래? 백기는 할 말이 있다는 듯 웃으며 청아에게 손짓할 거야. 지금 저희 둘 밖에 없는데요···.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곤 백기에게 귀를 가져다 대는 청아. 보안이 중요한 사안일 수도 있으니까, 하는 생각으로 조금은 긴장하고 있었겠지. 그러나 돌아온 건 난데없는 귓가에의 입맞춤. 마찰음과 함께 청아의 몸은 딱딱하게 굳었고 백기는 금세 귀 끝이 빨개진 청아를 보며 웃었지. 속았다는 사실에 분해진 청아는 귀를 붙잡고 백기를 노려봐. 지휘관님...!! 청아가 이를 꽉 깨물고 저를 부르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자리에 앉는 백기. 그 서류가 지난달 약물 불법유통 건인가? 자연스럽게 말을 돌리는 백기에 청아는 헛웃음이 절로 나왔어. 아마 그건, 특파서 내에서는 절대 곁을 내어주지 않는 청아가 은근 서운했던 백기의 귀여운 복수였을 거야.

DALB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