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길 잃은 아이의 부모를 찾아주게 된 백기와 청아. 한참을 울다가 청아의 품에서 진정한 아이는 청아를 자연스레 누나라고 부를 거 같아. 표정이 많지 않은 백기에겐 어쩐지 경계하며 아저씨라고 하겠지. 그 말에 백기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지만 청아는 크게 웃음을 터트려. 23살까지는 형 누나 해주나 봐요~ 능청스럽게 백기를 놀리기도 하고. 아이는 그새 청아가 마음에 들었는지, 자신의 집에서 같이 살자며 그녀의 손을 잡고 놔주지 않았지. 청아가 그럴까? 하며 밝게 웃자 왜인지 위기감이 느껴지는 백기. 누나는 형 집에서 살아야 돼. 백기가 단호하게 이야기하자 청아는 그의 허벅지를 아프게 꼬집어. 저를 째려보는 청아의 시선을 느낀 백기는 그제야 헛기침을 하곤 아이의 머리를 조심히 쓰다듬어줄 거야. 나중에 같이 놀러 올게. 그때까지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씩씩하게 지내야 해.
42.
백기가 18살, 청아가 17살이었을 때의 봄. 둘은 함께 하교하며 사귄다는 오해도 제법 받았을 거 같아. 그럴 때마다 아니라며 급히 손사래 치는 청아. 앗, 그런 게 아니고··· 그냥 같은 학교 선배예요! 열심히 해명하는 청아의 모습에 백기는 알게 모르게 서운했을 거야. 혼자 무슨 기대를 한 건가 싶어서 괜히 수치스럽기도 할 거 같고. 그렇게 복잡한 마음으로 청아의 집 앞까지 도착했을 때, 청아는 어딘가 고민하는 듯 보였지. 입술을 깨물며 망설이는 청아의 모습을 보자 백기는 청아가 방금의 오해를 신경 쓰는 건가 싶었어. 어쩌면 이제 더 이상 데려다줄 필요 없다고 말하는 건 아닐까. 백기의 표정이 어두워지려던 찰나, 굳게 결심한 듯 또박또박 말을 내뱉는 청아. 저도 그냥 선배라고 생각 안 하니까 걱정 말아요. 그건 백기의 속상함을 눈치챈 청아 나름의 당부였을 거야. 그리고 본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뜻밖의 말을 들은 백기는 충격에 말을 잃은 채 굳어버렸지. 청아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백기를 덩그러니 남겨둔 채 집으로 줄행랑치고. 그녀 역시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진심을 전하기까지 꽤 힘들었을 테니까. 집에 도착한 청아는 숨을 가다듬고 조심스레 창밖을 내다보았어. 그녀의 시야에 들어오는 건 아직도 그 자세 그대로 요지부동인 백기. 풉, 바보 같아···. 자신의 말을 듣고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그를 보며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을 거야. 그런데 순간, 백기의 고개가 청아의 집 쪽으로 올라가. 청아는 눈이 마주친 거 같다는 생각에 급하게 창문 밑으로 숨었지. 보고 있던 걸 들킨 건 아니겠지···! 청아는 유난히 제 앞에서 부끄러움을 잘 타는 백기가 종종 바보 같다고 생각했겠지만, 결국 그녀도 사랑에 면역 없는 열일곱 소녀이긴 마찬가지였어.
43.
백기의 비밀번호는 1024. 그가 아주 오래전부터 쓰던 숫자였지. 청아는 백기의 비밀번호를 알고는 있었겠지만, 그 뜻은 정확히 모를 거야. 1024가 무슨 뜻이에요, 선배? 문득 궁금해진 청아가 백기 향해 물으면 살짝 웃으며 대답하는 백기.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백기는 은행잎이 휘날리던 7년 전 가을. 용감하게 자신의 앞을 막아선 한 소녀를 똑똑히 기억해. 당시의 백기에겐 그 작은 등이 세상이 전부처럼 느껴졌을 거야. 내가 감히 그걸 잊을 수 있을 리가.
44.
#梅花 추위를 많이 타는 공주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태자. 하루는 몸에 좋은 약초를 직접 구해오겠다고 매섭도록 추운 북방의 산을 오르겠지. 공주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차가워진 태자의 손을 잡으며 속상해할 거야. 연주의 산은 춥고 험난하기로 자자한데···. 저보다 훨씬 작은 손으로 큰 손을 이리저리 만지며 온기를 나누어주려는 공주의 모습에 은근한 만족감을 느끼던 태자는 슬슬 장난기가 동해. 날이 많이 춥더군··· 공주가 입을 맞추어주면 따뜻해질 듯한데. 공주는 그의 당당한 요구가 얄미웠지만 그래도 저를 생각하여 산에 오른 태자가 고맙기도 해서 원하는 대로 해줄까, 잠시 고민하겠지. 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던 공주는 결국 태자의 입술에 따스한 온기를 남기고 떨어져. 꼭 감았던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웃음을 참는 듯한 태자의 얼굴. 사실 태자는 입술이 아닌 차가워진 손에 입 맞추어달라고 한 것이었는데, 갑작스레 입맞춤을 한 공주가 귀엽고 웃겼을 거야. 태자의 웃음에 어리둥절해진 공주에게 그것을 설명하자, 공주의 얼굴은 금세 빨갛게 달아오르겠지. 쥐구멍에 숨고 싶을 만큼 부끄러워진 공주가 태자의 품 속을 벗어나려 하면 태자는 그런 공주를 더 꽉 안고. 아니야. 공주가 현명하였어. 입술에 해주면 더 뜨거워질지도 모르지.
45.
비가 하늘을 뚫을 듯 쏟아지는 4월의 어느 날, 우산이 없던 한 소녀는 학교 안에서 서성거리고 있었어.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치지 않는 비. 결국 내일 감기로 고생할 각오를 하고 문 밖을 나서려던 찰나, 누군가 소녀의 앞에 우산을 내려놓고 뛰어나갈 거야. 늘 소녀의 곁에서 묵묵히 그녀를 챙겨주었던, 익숙한 뒷모습. 그래, 그 소년이었어. 저 선배, 지난번에도 우산을 주고 가더니 다음날 기침을 심하게 하던데···. 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던 소녀는 결국 그 소년을 따라 비 속을 뚫고 달려가. 저보다 훨씬 빠른 소년을 따라잡기 위해 아끼던 신발이 흙탕물에 젖는 줄도 모르고 달리는 소녀. 오늘은 꼭 이야기할 거야. 항상 고마웠다고. 그리고··· 더는 챙겨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제 다짐을 다시금 상기하며 점점 소년에게로 가까워지겠지. 선배! 소녀의 외침 소리에 놀란 소년은 급히 뒤를 돌아 비에 젖은 소녀를 확인해. 소녀의 손에는 그가 주고 도망간 우산이 들려있었어. 우산을 쓰지 않고 왜 나를···. 당황으로 흔들리는 소년의 눈동자와, 비에 온통 젖었음에도 또렷이 빛나는 소녀의 눈동자가 온전히 마주치는 최초의 순간. 소녀는 천천히 걸어와 소년에게 우산을 내밀어. 숨어서 지켜보기만 하던 소녀와 제대로 마주하게 된 상황에 소년은 당황을 숨기지 못했지만, 그 와중에도 소녀의 젖은 머리와 옷이 신경 쓰일 거야. ···잠시만. 소년은 떨리는 손길로 조심스레 많이 젖지 않은 제 외투를 소녀의 위에 덮어줘. 그러곤 소녀가 제게 내민 우산을 펼쳐 그녀에게 씌워주겠지. 그런 소년의 행동에 소녀는 본래 하려던 말을 새까맣게 잊고 말아. 분명··· 이제 그만 챙겨줘도 된다고 말하려던 거였는데.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면서 섬세하게 저를 보살피는 소년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이 피어오를 거야. 고마워요, 선배. 소녀가 웃으며 감사를 표하자 고개를 돌리고 얼굴을 붉히는 소년. ···아니야. 우산은 네가 가져가. 소년은 또다시 우산을 소녀에게 넘겨주려 하겠지. 그리고 소녀는 우산을 제게 들려주려는 소년의 손을 막을 테고. 엇··· 안 돼요. 지난번에도 이러고 기침하셨잖아요. 소녀의 정곡을 찌른 말에 소년은 몇 번 헛기침을 해. ···너 추위 잘 타잖아. 감기도 잘 걸리고. 겨울에 꽁꽁 언 손을 녹이기 위해 핫팩을 두 개씩 들고 다니던 소녀의 모습을 본 건지,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소년이었어. 소녀는 문득, 누군가에게 이런 따스한 관심을 받아본 게 참 오랜만이라고 느껴. 그럼··· 큰길까지 같이 쓰고 갈까요? 소년 쪽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가 미소 짓는 소녀. 전의 다짐은 모두 잊은 채 새로운 다짐만을 마음속에 새겨. 늘 곁에서 그의 다정에 꼭 보답해 주어야지.
46.
열이 올라 빨개진 청아의 얼굴을 볼 때마다 가끔 백기는 그 모습이 복숭아 같다고 생각해. 남이 보기엔 청아와 복숭아는 전혀 공통점이 없어 보이지만··· 늘 그렇듯 귀여운 거라면 뭐든 청아와 닮았다고 생각하는 백기. 분홍빛 얼굴을 몇 번 쓰다듬던 그는 참지 못하고 볼에 입 맞추겠지. 맛은 복숭아보다 더 단 거 같네.
47.
백기가 장기임무에 나간 사이 백기를 대신할 늑대인형을 산 청아. 꽤 크고 폭신폭신해서 안고 자기 딱 좋은 인형이었지. 그렇게 매일을 끌어안고 자다 보니, 백기가 집에 도착해서도 여전히 그 인형과 함께 잠에 들 거야. 분명 백기를 대신하여 산 거였는데··· 이제 백기를 밀어내고 청아의 품을 독차지 해버린 늑대인형. 백기는 단단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인형을 흘겨보며 말해. 내 품이 훨씬 따뜻할 텐데. 청아는 문득 백기의 못마땅한 표정이 늑대인형의 화난 표정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곤 푸스스 웃으며 답했지. 선배는 폭신폭신하지 않잖아요~ 장난스러운 청아의 말에 할 말을 잃은 백기는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잠에 들었어. 다음 날, 청아가 눈을 뜨자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다름 아닌 제 품 속의 백기. 안고 자던 늑대인형은 어디 갔는지, 그보다 훨씬 거대한 남자가 청아의 품 속에 들어가 있었을 거야. 그 남자는 청아가 자는 사이에 인형을 내던지고 그녀의 품을 차지했겠지. 어젯밤 골똘히 생각하던 게 이거였다니···. 어이없지만 그런 백기가 한편으로는 귀엽게 느껴져 새근새근 잠든 그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보는 청아.
48.
밤하늘 비행. 둘만의 언어로는 우주 산책. 백기가 청아의 허리를 힘주어 감싸고, 청아가 고개를 끄덕이면··· 우주를 향한 그들만의 여정이 시작되는 거야. 허공을 가르며 상승하는 바람에게 온 몸을 내어줄 때의 해방감은, 이루어 말할 수 없을 만큼 짜릿하겠지. 연모시의 가장 높은 건물을 넘어 구름에 닿을 듯한 경지에 이르면, 하늘을 수놓은 찬란한 별들의 풍경이 펼쳐져. 어때, 아름답지? 언제나 청아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경치. 네··· 정말 우주에 있는 것 같아요. 백기의 기대에 부응하듯, 청아는 금세 별들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버렸어. 청아가 황홀에 젖은 눈으로 밝게 웃자, 어느때보다 큰 미소를 짓는 백기. 청아의 행복은 곧 백기의 행복이었으니··· 백기는 그녀를 저만의 작은 우주로 여겼을지도 몰라. 저의 모든 것을 바쳐도 좋을 우주. 그 드넓은 우주의 중심이 되어 그녀의 모든 어둠을 몰아내어주고 싶었지. 백기는 청아의 눈을 바라볼 때마다 끝없이 깊은 우주에 빠진 기분이었어. 매사에 열정적인 그녀의 눈 속에는 항상 별들이 반짝이는 것 같았거든. 어쩌면 그가 우주 산책을 사랑하는 이유 또한, 연모시의 밤하늘이 청아와 꼭 닮아있어서 그럴지도 몰라. 선배, 저 소원 빌래요. 쉴새없이 감탄을 내뱉던 청아가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을 발견한 모양인지, 두 손을 꼬옥 모으고 눈을 감아. 꽤 오래도록 소원을 비는 듯한 모습에, 백기는 그녀의 머릿속이 궁금해질 거야. 네 소원이라면 내가 뭐든 이루어줄 텐데··· 하고 생각하면서. 선배는 소원 안 빌어요? 소원 빌기는 커녕, 밤하늘 구경도 뒤로 한 채 청아의 얼굴만 바라보던 백기의 허리를 쿡 찌르며 하는 말. 이제는 백기의 깊은 시선에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청아는 아직도 어딘가 간질거리고 설레는 느낌을 받겠지. 그리고 백기는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답해. 내 소원은, 지금 바로 내 앞에 있어.
49.
#梅花 여느때와 같이 함께 밤길을 걷다 궁으로 돌아온 태자와 공주. 아까 공주가 반딧불이의 뒤를 쫒느라 활발히 움직였던 탓인지, 상의가 조금 흘러 내려와 있었어. 그 모습을 발견한 태자는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 공주의 옷을 정리해주겠지. 공주의 몸은 나만이 볼 수 있는 것인데···. 짙은 어둠이 깔려있었던 터라 태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공주를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런 태자를 보며 웃음을 참던 공주는 이내 그를 향해 호기롭게 말할 거야. 그럼 제 환복을 돕는 궁녀가 되셔야겠네요. 황태자에게 제 시중을 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당돌한 말에도, 태자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답해. 어렵지 않지, 지금도 도와줄 수 있는데. 금방이라도 공주의 옷깃을 내릴 듯 붙잡곤 느릿하게 내뱉는 말. 맹랑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공주는 태자의 행동에 잔뜩 당황하고 말았지. 농이었어요, 전하...! 뒤늦게 수습하려 해보지만 태자의 표정을 보니 때는 이미 늦어버린 듯 했고. 장난스레 옷을 내리려는 제 손을 작은 두 손으로 꼭 붙잡은 공주가 귀여웠던 태자는 그녀를 더욱 놀리겠지. 공주는 나를 볼 때마다, 마치 고양이를 만난 쥐 같군. 이번에는 도망갈 수 없을 것이다.
50.
깊은 어둠이 내려앉은 연모시의 새벽. 술에 취해 덥다며 옷을 훌러덩 벗어던지고 잠든 청아는, 어느새 몸이 으슬으슬해져 잠에서 깨어나. 추위를 이겨내려 따뜻한 백기의 품으로 더욱 파고 들어보았지만 역부족이었어. 결국 비몽사몽한 채로 손에 잡히는 옷을 주워 입곤 다시 잠에 들었지. 다음날 아침··· 청아는 익숙한 웃음소리에 눈을 떠. 흐릿한 시야를 통해 보이는 건 역시나 입가에 미소를 가득 머금은 백기. 뭐가 그리 좋은건지, 청아의 머리를 살살 어루어 만지다 웃음기를 띤 채로 입을 열어. 지금 유혹하는 거야? 일어나자마자 들은 엉뚱한 말에 청아는 자연스레 할 말을 잃었지. 그러다 문득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평소보다 조금, 아니 상당히 크다는 것을 알아차릴 거야.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몸을 덮은 옷은 제 눈 앞의 남자의 것이었어. 아아···. 그제야 백기의 말 뜻을 깨달은 청아는 앓는 소리를 내더니 창피한 듯 베개로 제 얼굴을 덮어버리겠지. 졸려서 실수했나봐요. 제 옷 좀 가져다주세요···. 베개 밑으로 웅얼웅얼 들리는 청아의 목소리. 발음이 잔뜩 뭉개진 음성을 듣던 백기는 웃으며 그녀의 얼굴을 가린 베개를 치워내. 계속 입고 있어도 돼. 아침부터 달콤한 구경을 했다는 생각에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Winter